"충무공 순국일"
이은애 (미주 이순신 교육본부 본부장)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한번은 떠난다. 모든 사람에게 영생불사의 유전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모하는 마음뿐, 모두가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다만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떠나는가만 다를 뿐이다. 양력 12월 16일, 음력으로는 동짓달 11월 19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겨레와 나라를 구하시고 차가운 남해 관음포 바다에서 54년이란 짧은 일생을 마감하신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날이다. 그 해가 1598 무술년 이었으니 올해로 418주 기년이 되는 셈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4월 18일(음력 3월 8일) 덕수 이 씨인 문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셨는데(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등 비천한 관직으로 전전하던 중 어느 날 당시 조선조정의 인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이조판서 이율곡이 그가 같은 문중인 걸 알아 유성룡을 통해 만나보자고 청했다.
이순신을 극진히 아끼던 유성룡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한 걸음에 달려와 이순신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면서 선비의 모범으로 살고 있던 이순신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율곡이 같은 문중이니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가 이조 판서로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것이오” 유성룡은 아연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공적인 일에 사적 정실이 개입되는 것을 엄격히 관리했던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 시절 상관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가 뒤에 크나큰 불이익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순신의 이와 같은 공평무사한 원칙주의는 사적 정실이 개입되는 공직자의 금과 옥조로 오늘 날에도 인성교육의 표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뒤로 이순신은 조선의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마침내 7년의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감하며 그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는 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죽음을 멀리하고픈 인간 심리의 영향 때문 일까? 위인 걸사 성인을 말할 때 세상을 떠난 기일보다는 태어난 탄신일을 더욱 힘주어 기리는 관행을 보게 된다. 아마도 천지조화의 운기를 타고 큰일을 할 것이 미리 점지해서 태어났다는 탄생 신비주의 의식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출생 신비주의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현상으로 볼 때 출생이란 본인의 의지나 각오와 무관하게 아무 의식 없이 이 세상 태어난다. 그러므로 생일이란 하나의 역사적 기록은 될 지언정 경모와 찬양의 요건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무의식으로 태어났으되 성장과 교육과 뚜렷한 의지로 인류역사에 크게 기여한 성자, 위인 ,영웅일수록 그 일생의 업적이 모두 마감되는 시간인 죽음을 기리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순신과 같이 우리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존경을 받는 민족적 표상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오는 16일, 조국의 난세 속에 맞는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일 에는 공의 눈부신 공로 보다는 소박하지만 자기 관리에 철저 했던 공의 몸가짐을 되새겨 본받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듯하다.
아울러 우리 모두100세 인생이라 하여 오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비록 짧게 살지언정 이 땅에 어떤 향기와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