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탄생과 가문 덕수 이씨

이순신의 탄생과 가문 덕수 이씨 (德水 李氏)

 

 

 

 

이내원 (이순신 숭모 교육가)

2017 년 9 월

모든 한국인들의 지극한 존경과 기림을 받는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그 배경이 된 가문의 내력에 비추어 보는 것은 뜻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조선 인종 원년인 1545 년 음력 3 월 8 일(양력 4 월 28 일) 당시의 지명으로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 마른내), 현재의 서울시 중구 인현동 1 가 부근에서 덕수 이씨 11 대손 이정(李貞)과 그 부인 초계(草溪) 변(卞)씨 사이의 4 남 1 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건천동은 장안이기는 하였으나 변두리에 해당하는 한적한 동네로 알려지고 있어 이순신 집안이 상류가 아닌 평범한 양반가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는 고려 중기 정 5 품 중랑장(中郞將- 현재의 연대장급)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중시조로 하고 있어 그 뿌리가 무반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3 대조와 4 대조는 문과급제하고 6 대조는 다시 잡직 장교를 지내 문무를 오락가락한 셈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7 대조 이변(李邊)은 문과급제 후 정 2 품 예문관 홍문관 양관 대제학과 정 1 품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9 대조 이거는 문과 급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거치며 엄격하기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성종 말년 세자 시강원 보덕으로 연산군의 사부(개인교수)가 되면서 가문이 문반으로 화려하게 꽃 피게 된다.

조부인 이백록(李百祿)은 초시를 거쳐 성균관 생원이던 중종 14 년 신진 개혁 사류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다가 기묘사화에 처벌을 받게 된다. 다행히 연소한 제자라는 이유로 극형은 면했으나 탈고신(奪告身)이라는 자격정지 처분을 받아 과거 응시를 하지 못하고 조상의 덕으로 음직인 평시서 봉사(시장 관리관)를 지냈다.

이에 더해 이백록은 중종이 승하(사망)하여 국상 중인 줄을 모른 채 지방으로 내려가 아들을 혼인시키느라 잔치를 벌려 국법을 어긴 죄로 징벌을 받고 급기야 장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환란을 지켜 본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과 서울 생활에 환멸을 느껴 꿈을 접고 가족을 거느리고 처가가 있는 아산 백암리(白岩里- 배암골, 현재 현충사 일대)로 낙향을 함으로써 이름뿐인 양반 가문으로 내려 앉게 된다. 이 때가 이순신의 나이 13 세 경으로 아산을 사실상의 고향으로 삼아 이곳에서 꿈 많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이곳에서 21 세 때 이웃동네의 보성 군수를 지낸 명궁 무장 방진(方震)의 외동딸에게 장가들어 문반 이순신의 무반 전향의 결정적 계기를 맞은 듯하다. 실로 구국의 명장 이순신의 등장이 이 혼인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 혼인의 중매는 명종대 영의정을 지냈던 이준경이 선 것으로 보아 양가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 다음 해인 22 세에 무과훈련을 시작하고 28 세 때 첫번째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 실패하고 4 년뒤인 32 세 때 정기 무과시험에서 병과 4 등(29 명 중 12 위)로 합격한다. 그 해 12 월 첫 임지인 함경도 두만강변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시작하여 훈련원 봉사, 다시 함경도 조산보 만호, 그리고 발포(고흥) 만호로 처음 남해안 수비대장이 된다. 이후 행정관인 정읍현감을 지낸 후 좌의정 유성룡의 특별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수사로 수군 지역 사령관이 되어 이곳에서 1592 년 임진왜란을 맞는다.

이후 7 년의 기나긴 전쟁기간 동안 전승을 거두며 구국행진을 계속하였으나 선조 임금의 오판으로 백의종군의 고통을 받기도 했다. 원균에 의한 칠천량 참패로 겨우 남은 13 척의 판옥선으로 133 척의 일본함대를 기적적으로 격파 퇴치함으로써 꺼져가는 나라를 구해 냈으나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적의 조총을 맞고 전사함으로써 조선은 불세출의 영웅을 잃는다.

5 세 7 충 2 효, 충효의 가문

충무공 이순신 가문의 영예로움을 한마디로 이르는 찬사이다. 이순신 가문은 5 대에 걸쳐 일곱명의 전사자와 두 명의 국가 지정 효자가 배출된 집안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순신의 노량해전 전사, 셋째 아들 면의 아산 전사, 서자 훈과 조카 완의 정묘호란 전사, 서자 신의 이괄의 난 전사 후 4 세손 홍무, 5 세손 봉상 전사와 7 세손 이빈, 제빈 두 효자를 이름이다. 이순신과 세 아들이 전사하였으니 한 가정 4 부자가 전사한 충신가의 으뜸이라고 할 것이다.

역대 통제사의 명문

초대와 3 대 통제사를 지낸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한 후 고종 31 년인 1894 년까지 330 년간 208 대 통제사가 이어졌는데 그 중 이순신 후손이 12 명 들어 있으니 이순신의 초대와 3 대를 합하여 이순신 직계가 14 번의 통제사를 역임하여 가히 통제사 가문이라 할 것이다.

초계 변씨(草溪 卞氏) 가문과의 뿌리 깊은 혼인 관계

이순신 가문을 말핛 때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 모부인(어머니) 변씨로 연결되는 초계 변씨 가문이다. 우선 이순신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초계 변씨이고 이순신의 누이가 초계 변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 3 대에 걸쳐 3 중으로 혼인관계가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중첩된 두 가문갂의 혼인관계는 그 뿌리가 세종대의 7 대조 이변과 과거시험 합격 동기인 변효경(일본에 통신사로 다녀 온 변효문의 동생)과의 뿌리 깊은 교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덕수 이씨 (德水 李氏) 가문

덕수 이씨 가문을 말할 때 문(文)에서는 율곡 이이, 무(武)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표어가 따라 다닌다. 율곡 이이는 충무공보다 나이로는 9 살 위이나 항렬로는 한 대가 아래인 덕수 이씨 13 대 손으로 이순신에게는 19 촌 조카뻘이 된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로 초급장교 생활을 할 때 율곡은 병조 판서로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직접 상관의 위치에 있었으나 엄격한 이순신이 만나기를 기피하여 평생 만난 일이 없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와 조선 현모양처의 표상인 어머니 신사임당의 아들로 첫번째 문과 과거에서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성리학 논설을 제출하여 장원급제한 후 연달아 여덟번을 내리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아홉번 장원급제한 석학)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조선 제일의 천재학자임을 증명한다.

율곡은 선견지명이 있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력을 한양에 2 만명, 8 도에 각 1 만명씩 도합 10 만 양병설을 주창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같은 문중의 충무공 이순신이 대신 막강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해 냈으니 덕수 이씨 가문을 조선 제일의 명문(名門)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