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김연지
혹시 당신은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한국사람의 백의 백중 임진왜란, 한산도 첩, 또는 거북선이라고 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중의 몇은 이 장군님의 명사인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를 읊을수도 있을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감히 누구와도 비교할수없는 용맹함과 높으신 업적도 세우셨지만, 제독의 인간적인 품성에 해서 생각해보신적 있으신가요? 이순신 장군님의 인간 품성은 비록 셀수 없지만, 그중에서 몇개를 읊자면 나라를 위한 희생,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 리더쉽과 지혜, 공정성, 윗사람이 아닌 아랫사람을 위한 마음 더불어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배려심과 끊임없는 추구력이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직접 적으신 난중일기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7년동안의 일기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중 1952년 5월 29일 이순신 장군께서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는 바람에 혼자서 장수들을 이끌고 새벽에 노량으로 왜적을 싸우러 가셨습니다. 싸우는 도중 이순신 장군은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비록 한 군사가 “어깨에서 피가 용솟읍십니다!” 말한지언정 장군께서는 “괜찮다, 적이 사기를 잃었으니 끝까지 무찔러라!” 하셨습니다. 비록 탄환이 장군의 어깨를 통과하지만, 그 고통을 무릎쓰고 이순신 장군께서는 나라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피가 용솟을 정도이면 상처가 꽤 깊었을 테언데 장군께서는 눈 깜박하시지 않고선 왜적을 무찌르는것이 우선이셨습니다. 이것은 싸움에 임한 진정한 장수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 또한 나라를 위한 장군님의 희생정신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살아계실 생전에 “어머님은 곧 하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난중일기에는 장군님께서 언급하신 ‘어머니’ 라는 단어가 약 100개 이상입니다. 1992년 1월 1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찾아왔을때 이순신 장군님께서 인사를 건네고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어머님은 어떠하시냐?” 였습니다. 또한 장군은 “벌써 두 해째나 어머님을 모시고 설을 쇠지 못했으니 내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나랏일이 편치를 않아 어머님을 편히 모시지 못하는구나” 하시고 “어머님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셨습니다. 두해째 한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설도 제로 지내시지 못하셨으면 얼마나 나랏일로 바빴을까요? 아마 몸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셨을 상황이셨을 것입니다. 허나, 이 장군님께서는 자신은 뒤로, 어머님 먼저입니다. 맛있는 음식, 혹은 아내와 아들과 보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아닌 아들로서 어머님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이순신 장군님의 마음을 울리는 것입니다. 1953년 5월 4일에는 어머님 생신인데 찾아뵙지 못하여 슬퍼하셨다고 되어있으나 아내의 생일인데 찾아뵙지 못하여 슬퍼하던 것은 찾을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께서 어머님을 하늘에 비유하신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은 물리적으로 사람에서부터 높고 멀리 떨어져있기때문에 고개를 들어 볼수밖에 없고, 또한 닿을수 없습니다. 그뜻은 장군님께서는 어머니를 헤아릴수없이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과 지혜는 감히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1953년 2월 18일 왜적의 여전한 움직임이 웅천에 있었을때 난중일기에서는 장군님께서 명을 내리십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미리 숨어 있다가 적을 공격하고, 다른 배들은 적을 유인해 내라.” 그렇게 명하고 나서 장군님께서 내리신 작전은 성공 이었습니다. 곧바로 왜선 10여척이 따라나와서 경상도의 복병선이 5척이 뒤쫒아 왜선을 둘러쌓아 화살을 쏘움을로 인하여 수많은 왜적을 물리칠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장군께서 말씀하시되, “수많은 왜적이 죽자 적의 기세가 꺾여 뒤쫓아 오는 배들이 없었다” 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지혜로운 작전에 따라 왜놈들을 성공적으로 무찌를수 있었던것입니다. 장군님의 또한 풍부한 경험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쉽 덕분에 사도 첨사 김원은 다른 뜻 없이 용기있게 임을 행할수 있었고 장군님의 명에 거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공정하고 병사들을 남보다 더 생각하시는 장군이습니다. 1593년 2월 22일 새벽에는 왜적들은 물리칠수있었지만 발포의 2척과 가리포의 2척이 명령을 듣지 안하다가 암초에 걸려 왜적들의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장군께서는 또 읊으셨습니다: “얼마 뒤 진도의 지휘선 1척이 왜적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는데, 다행이 우리 편이 달려내어 구해 냈다. 하지만 경상 우수사 원균의 부하들은 보고만 있었다.” 원균은 이에 의의를 제기하는데 이유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우리 배가 공격당하는것을 보고도 못 본체했으니 너무나 괘씸하오… 함꼐 죽고 함꼐 살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제 한목숨 지키려고 나서지를 않다니!” 허나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핑계를 무시하고 경상 자위장과 우부장 신 원균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를통해 이순신 장군께서는 잘못을 행한 자는 봐주시지 않으셨다는것을 배울수가 있습니다. 비록 원균은 자위장과 우부장 보다는 더 높은 지위지만, 이순신 장군은 왜적에게 둘러싸지만 아무런 지위를 안내린 원균을 꾸짖으셨고 또한 마지막 “이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홀로 가슴을 칠 뿐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또 1594년 1월 20일에는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인지 옷을 제로 갖춰 입지 못한 군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추위에 떠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아파 왔다” 라고 적으셨습니다. 그토록 이순신 장군께서는 병사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크셨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또한 나라를 위해서 끊임없는 추구를 하신 장본인이십니다. 1953년 2월 17일 새벽녘 서재에서 이남, 허정을 등을 만나고 임금님이 내리신 분부를 토론을 하셨습니다. 같은해 5월 13일에는 “자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날이 밝을 즈음에야 잠시 눈을 붙다” 하셨습니다. 1594년 7월 17일 난중일기에서는 장군께서 이른 새벽에 포구에 나가 진을 치고 나선 후, 오전 10시쯤 배 5척에 돛을 달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요청한 명나라 장수 장호유를 맞이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장군은 “밤이 깊도록 왜적의 움직임에 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셨습니다. 비록 장군은 피곤하셨겠지만 한국의 외교를 위하여, 또 명나라에서 오신 장수를 배려하여 피곤에 쩔은 몸을 불사시르셨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장수와 더욱 효과적으로 왜적을 무찌를수있도록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토록 장군께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달고 살으셨어야 했지만 나라를 위해 쉬지 않으시고, 잠도 줄인체, 앞만 보고 싸우셨습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님께서 16세기 조선시사람이 아닌 현인이다면, 아주 공을 많이 들인 명예 장교였을 것입니다. 시대는 벌써 약 500년 이상이 흘렀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이순신 장군 같으신 장교는 커녕, 설령 대통령, 혹은 그의 업적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이순신 장군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장군처럼 나중에 나라를 위해서 힘쓰고 일을 하는 바람직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현재 고등학생으로써 비록 이순신 장군을 통해서 배울 점이란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 신분을 고려했을 때 가장 쉽고 또 빠르게 실천할 수 있는 점은 더욱더 부모님께 효도하고, 또 감사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표현한 적이 거의 없었고, 또한 어떤 경우의 어머니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아주 불효한 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서 고생을 이만 저만 마다하셨지만, 저는 장군님처럼 한번도 어머니께 감사한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가 수필하신 난중일기를 통해서 저는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볼수 있었으며, 또한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다시 생각할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비록 생애는 짧았지만 본받을 점은 한국의 어느 위인보다도 헤아릴 점이 많으신 분이 이순신 장군님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단한 인물로 모든 학생들은 그를 전형적인 표본으로 삼아야 되고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또 그의 품성을 학생들이 공부함에 따라 장군님과 같은 위대한 의인이 21세기 현제시대에 나올수 있을것입니다. 그는 정말 위한 한국역사 최고 영웅이셨습니다.
참고문헌
거북선-- 김재근, (정우사, 1996).
난중일기--저자 이순신, 역 이석호, (집문당, 1996).
충무공 이순신-- 조성도, (연경문화사, 2001).
지원자 이름: 김연지
학년/학교명: 12학년/ WT Woodson High School
주소: 9219 Claytonia Ln. Annandale, VA 2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