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의 역사적 의의"
이은애 (미주 이순신 교육본부 본부장)
해마다 8월이 되면 누구나 우리 조국의 국경일인 8.15 광복절을 떠 올린다. 그러나 그 바로 하루 전인 8월 14일이 유명한 한산대첩 기념일인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통영시민들이 해마다 8월 14일을 기해 충무공 한산대첩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국민의식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한다니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된다.
이 일은 우리 워싱턴의 이순신 부활행사와 세계화프로젝트 소식이 본국에 알려지면서 통영행사 관계자가 초청의사를 전해오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워싱턴 동포들도 이 한산대첩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산도 해전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후 같은 해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에 있었던 이순신 연승행진의 여덟 번째의 해전이다. 앞서 있었던 옥포해전으로 시작되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 7개 해전이 포구마다 분산 배치된 일본 수군을 수색 토벌하는 탐색전이었다면 한산도 해전은 조선과 일본의 최정예 함대가 남해의 제해권을 걸고 대결한 일대 결전이었다는데 큰 차이가 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는 이순신을 격파하지 않고는 조선 침공계획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바로 한달전 조선의 충청, 경상의 근왕병 5만을 몰살시킨 무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남해로 내려가 이순신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신만만했던 와키자카는 최정예 73척 만을 이끌고 단독 출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을 맞는다. 여기서 이순신은 그 유명한 학익진법, 즉 적을 유인하여 학이 날개로 먹이를 감싸며 머리를 쪼아 대는듯한 포위 작전을 별여 적선 73척 중 59척을 격파하고 일본 수군 6천여명을 수장해 버렸다. 기세가 등등하던 와키자카는 허겁지겁 인근 무인도에 올라 보름동안 해초만 뜯어먹고 연명하다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탈출한다. 지금도 일본의 그 후손들은 이 조상의 고난을 기념하여 1년에 하루 해초만 먹는 날로 지킨다고 전해진다. 이후 도요토미는 ‘이제부터 이순신을 만나거든 싸우지 말고 해안으로 피하라’는 피전명령을 내렸으며 물자보급을 받지 못해 불안해진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의 육군 장수들은 전의를 상실해 남해안으로 퇴각하는 전기가 되었다. 후일의 역사가들은 이순신의 이 한산대첩으로 도요토미의 조선정벌과 대륙진출 계획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로서 조선뿐만이 아니라 허약한 명나라까지 지켜주어 동양3국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한다.
그리고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것이 거북선인데 실제로 거북선은 이순신 함대의 주력은 아니고 돌격대로 삼았기 때문에 보유대수는 소수였으며 한산대첩에도 3척 만이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소수였던 이 거북선의 활약은 대단하여 한산해전에 종군했던 일본 승려 진자에몬은 ‘거북선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우리 대장선을 들이받아 선체를 부수고 화포를 쏘아대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 6일 미 해군연구소가“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7대전함”을 조사 보고한 바에 따르면 1위가 미국 USS Constitution (1797년 목제측면 장갑 범선, 길이 62m)이고 그 뒤를 이어 2위가 한국의 거북선(1591년, 목제등판 장갑, 길이 20m) 으로 되어있다. 거북선은 비록 크기가 초라할 만큼 작지만 다른 전함에 비해 200년 이상 앞서 기발한 방탄 장갑선을 창안했다는데 높은 평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한산대첩과 그에 기여했던 위대한 전함 거북선을 생각하며 우리도 통영시민과 함께 ‘이순신 세계화와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에 상호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